흙바닥을 기어 내려온 손이, 아직 떨리고 있었다.
류성하는 그 손을 폈다 쥐었다. 명문 검문의 소문주가 가시덤불에 긁힌 자국이었다. 검을 쥐고도 곁에서 사람이 죽는 걸 못 막은 손이기도 했다.
비탈 중턱에 쇠말뚝이 박혀 있고, 거기 색 바랜 헝겊이 묶여 있었다. 그 옆 나무판에는 화살표 하나와 알 수 없는 글자.
"이 표식이 가리키는 곳에 마을이 있다는 뜻이오?" 류성하가 물었다. 진법의 방위표일 수도, 길잡이의 약조일 수도 있었다.
"……그냥 가자." 사도혁이 먼저 비탈을 디뎠다.
류성하의 눈은 헝겊에 한 번 더 머물렀다. 강호였다면 누군가 이 산에 진을 친 흔적이라 읽었을 것이다. 여기선 그게 무엇인지 알 길이 없었다.
"검을 버려." 사도혁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류성하의 오른손이 벽운검 자루를 그러쥐었다. "강호의 도리가 아니오. 무인이 검을—"
"그 도리가 방금 열 명을 죽였어." 사도혁이 말을 잘랐다. "저 위에서. 칼 든 것들만 골라서."
류성하는 답하지 못했다. 능선 위쪽, 나무 사이로 곧은 불빛 몇 줄기가 천천히 쓸려 다녔다. 그것이 무엇을 찾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분명 사람을 찾고 있었다. 위로는 죽음이 있었다.
이상한 건 그 반대편이었다. 어느 쪽으로 발을 디뎌도 류성하의 몸은 아래쪽 비탈로만 쏠렸다. 도시의 불빛이 거기 있으니 사람과 먹을 것도 거기 있겠거니, 그는 그렇게 여겼다. 발이 먼저 알고 머리가 나중에 핑계를 댄 줄은, 몰랐다.
여섯은 내려갔다. 정파 셋, 마교 셋. 누구도 다른 누구를 베지 않았다. 무공도 안 나오고 위에선 죽음이 쓸려 다니는 판에, 숙적을 베는 건 사치였다.
*
산 아래는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동네였다.
류성하는 가장 먼저 마주친 사람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본인은 길을 잃은 객이오. 이 근방에 객점이 있소?"
여자는 그 말을 알아들은 게 아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는 데 놀라 뒷걸음쳤다. 류성하의 정중한 하오체도, 손짓도, 그 여자에게는 짐승의 울음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가 걸렸다. '근방'이라는 두 음절이, 여자의 입에서도 비슷하게 한 번 굴러 나왔다. 알아들어서가 아니었다. 어디선가 심어진 것처럼, 그 한 마디만 두 사람의 입에 똑같이 들어 있었다.
류성하는 그게 더 께름칙했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그럴 만했다. 새벽 골목에 강호 복식의 사내 여섯, 그중 하나는 곽철이었다. 마교의 살수는 가만히 서 있어도 짐승의 기척을 풍겼다.
멀리서, 무언가가 길게 울었다. 높았다 낮았다 하는, 처음 듣는 소리. 류성하는 그게 짐승인지 신호인지 가늠하지 못했다. 그 소리의 뜻을 아는 자가, 여섯 중엔 없었다.
*
골목 한 귀퉁이, 불을 켠 큰 쇠통 앞에서 여섯은 잠시 멈췄다.
굶주림이 두려움을 이긴 거였다. 곽철이 그 쇠통을 한 대 쳤다. 안에서 불빛이 깜빡였다. 곽철이 더 세게 쳤다.
"그건 두드린다고 밥이 나오는 물건이 아니다." 류성하가 말했다. 그 자신도 그게 무슨 물건인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두드릴 것은 아니라는 건 알았다.
진소운은 달랐다. 막내는 쇠통에 박힌 동전 구멍과 깜빡이는 불빛을 영악한 눈으로 더듬고 있었다. 무엇을 넣으면 무엇이 나오는지, 그 셈을 벌써 굴리는 얼굴이었다.
"가자." 사도혁이 골목 끝을 보고 있었다.
거기서, 붉고 푸른 빛이 번갈아 돌았다.
*
쇠수레 두 대가 골목 입구를 막았다. 그 옆구리에서 그 빛이 돌았다.
내린 자들은 같은 빛깔 옷을 입었고, 손에는 그 작고 검은 물건을 들었다. 어젯밤 야산에서 사람을 꿰뚫던 것과 같은 종류. 류성하의 등이 곤두섰다.
맨 앞의 사내는 무전을 귀에서 뗐다가, 도로 내렸다. 동료들보다 반 보 물러선 채, 여섯을 읽고 있었다. 산에서 내려온, 도검을 든 여섯.
"손 올려. 천천히."
류성하는 그 말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었어도 따르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따를 수도 없었다.
검을 뽑으려 했다. 진기를 부르려 했다. 어젯밤처럼 우물은 비어 있었다. 두레박이 아니라, 이번엔 줄이 끊긴 느낌이었다. 단전에서 무언가가 어긋난 채 돌아오지 않았다.
"쓰지 마." 사도혁이 낮게 말했다. "써도 안 나와. 나와도 죽어."
검은 물건들이 일제히 올라갔다.
그때 곽철이 터졌다.
마교의 살수가 가장 가까운 사내에게 맨몸으로 짓쳐들었다. 광화를 부르려는 거였다. 통각이 마비되고 속도가 폭증하는 그 짐승의 변신. 그것도 오지 않았다. 진기가 없었다. 곽철은 그냥 덩치 큰 사내가 미친 듯이 달려드는 꼴로 대오에 처박혔다.
검은 옷들이 그쪽으로 쏠렸다. 고함이 터지고, 한 명이 곽철의 등을 개머리판으로 찍었다.
"지금." 사도혁이 끌었다.
진소운이 먼저 움직였다. 막내가 날뛰는 곽철의 뒤로 파고들어 목덜미 혈을 짚었다. 무공이 아니라 손끝의 기술이었다. 곽철의 다리가 풀렸다. 백서린이 그 틈에 침 한 대를 목에 꽂아 넣었다. 곽철이 거품을 물고 늘어졌다. 여월이 그 큰 몸을 끌어 적재물 더미 뒤로 당겼다.
검은 옷들의 눈이 곽철이 처박힌 자리에 묶였다. 그 잠깐.
류성하는 맨 앞 그 사내의 눈이 자기 쪽으로 돌아오는 걸 보았다. 사내는 곽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산 위에서 무언가를 떠올린 얼굴로, 여섯을 헤아리고 있었다.
"이쪽." 사도혁이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막힌 줄 알았던 그 끝에, 시장 쪽으로 한 사람 지날 틈이 빼꼼 열려 있었다.
여섯은 그 틈으로 기어들었다. 화경의 검객이 흙과 적재물 사이를 무지렁이처럼 기었다. 등 뒤의 고함은, 그들을 못 본 채 곽철이 처박힌 자리에 쏟아지고 있었다.
*
시장으로 드는 길은, 또 한쪽뿐이었다.
류성하는 곽철을 둘러업은 채 그 좁은 길을 보았다. 갈림이 있을 때마다 막힌 쪽과 열린 쪽이 늘 정해져 있었다. 한 번도, 두 길이 동시에 열린 적이 없었다.
"운이 따르오." 류성하가 말했다. 위로는 죽음이고 뒤로는 총구인데, 발밑만은 늘 한 줄기 길이 났다. 하늘이 무인을 버리지 않은 것이라고, 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사도혁은 그 좁은 길 끝을 한참 응시했다.
"운." 그가 그 말을 곱씹었다. "길은 트여 있어. 한 번도 안 막혔지." 그의 눈이, 류성하가 못 보는 무언가를 더듬었다. "그게 우릴 살려두려는 건 아니고."
"무슨 뜻이오."
"누가 우릴 몰고 있어. 양 떼처럼." 사도혁이 짧게 답했다. 그 이상은 그도 못 읽는 눈치였다. 현경의 기감이 닿는 끝이 거기까지였다. "어디로 모는지는, 가 보면 알겠지."
류성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
길은 새벽 재래시장으로 이어졌다.
천막들은 다 닫혀 있었다. 단 한 곳, 어귀의 허름한 가게만 불이 켜져 있었다. 김이 무럭무럭 솟는 큰 솥. 그 앞엔 아직 사람이 없었다.
여섯은 그 앞에 멈췄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더 갈 길이 없어서였다. 한쪽만 열리던 길이, 여기서 끝나 있었다.
가게 안에서 솥뚜껑을 여는 소리가 났다. 김이 쏟아졌다. 늙은 여자가 혼잣말하듯 뭐라고 했는데—
그 목소리가, 어젯밤 귓속을 파고든 그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류성하는 문고리에 손을 댔다. 댔다가, 떼었다. 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드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함정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 저 안의 목소리가 무엇인지, 그는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안에서는 자꾸, 국이 끓고 있었다.
— 3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