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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轉移) — 떨어진 자들 · EP9

베면 살인

EP9 · 시점 류성하

뒷세계는 약속을 지키는 자들이 아니었다.

이름과 숫자를 팔았던 그 무리가, 사흘 만에 다시 찾아왔다. 위조 패의 값을 더 내라는 것이었다. 한 번 약점을 내준 유령들에게서, 그들은 두고두고 빨아먹을 작정이었다. 우두머리가 부하 예닐곱을 끌고 낡은 건물 계단을 올라왔다.

그중 몇의 손에, 그 검은 쇳덩이가 들려 있었다.

"……또 너희군." 류성하가 천에 싼 검을 쥐며 앞으로 나섰다.

좁은 방이었다. 뒤에는 백서린과 여월이, 곁에는 진소운이 있었다. 사도혁과 곽철은 마침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우두머리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무어라 지껄였다.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그 손짓은 분명했다. 가진 걸 다 내놓고, 여자들은 두고 가라는.

류성하의 안에서, 무언가가 차갑게 식었다.

강호였다면, 이것은 생사결의 사유였다. 약자를 노리고, 여인을 탐하고, 신의를 저버린 무리. 강호의 율법으로 이런 자들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c15). 청천검의 검이 한 번 울면, 이 일곱은 이 계단을 내려가지 못한다.

류성하의 손이 검을 감싼 천을 풀었다.

벽운검의 푸른 검신이, 사흘 만에 빛을 보았다.

*

그가 검을 뽑은 순간,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벌어졌다.

첫째, 우두머리가 검은 쇳덩이를 류성하에게 겨눴다.

둘째, 계단 아래에서 짐승의 울음이 터졌다.

곽철이었다. 돌아온 살수가, 제 식구를 노리는 무리의 살기를 맡고 — 광화(狂化)의 스위치가 곤두섰다. 영기 마른 몸으로도, 피와 위협 앞에서 혈랑의 본능은 깨어났다. 곽철이 계단을 짓쳐 올라 무리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비명이 터졌다. 검은 단도가 번뜩였다. 한 사내가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곽철, 멈춰!"

류성하가 외쳤으나 늦었다. 광화에 들어선 곽철은 피아를 가리지 못했다(c43). 그 눈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무리를 베고, 또 베려 했다. 이대로면 일곱이 다 죽는다. 그리고—

류성하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일곱이 죽으면, 우리가 끝장이다.

사도혁이 첫날 밤 곽철에게 한 말이, 이제야 그 무게로 다가왔다. 이 땅에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강호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저 죽은 눈들이(CCTV) 보고 있고, 저 소란을 좇아 관(官)이 온다. 일곱을 베는 순간, 여섯은 살인자가 되어 이 거대한 도시 전체의 사냥감이 된다(fk6).

강호의 협으로는 베어 마땅한 자들을.

여기서는, 벨 수 없었다.

*

류성하는 검을 거꾸로 쥐었다.

날이 아니라 등으로. 그는 광화한 곽철의 등 뒤로 파고들어, 검 손잡이로 그 후두부의 혈을 정확히 내리쳤다. 점혈과 타격을 겸한 일격. 동시에 진소운이 표풍신법으로 곽철의 다리를 걸어 균형을 무너뜨렸다. 백서린의 은침이 곽철의 목덜미 혈에 박혀, 광화를 강제로 냉각시켰다(c43 안전장치).

거품을 물고, 곽철이 무너졌다.

류성하는 그 길로 몸을 돌려, 남은 무리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베지 않았다. 검의 등으로 손목을 치고, 검신의 평면으로 어깨를 후려치고, 칼자루로 명치를 박았다.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살상보다 몇 배 어려운 검로. 화경의 무위가, 죽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검은 쇳덩이를 든 우두머리만이 남았다.

그가 떨리는 손으로 류성하를 겨눴다. 류성하는 그 거리를 가늠할 수 없었으나,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검을 던지듯 휘둘러 그 쇳덩이를 쳐 냈다. 굉음과 함께 총탄이 천장에 박혔다. 우두머리가 손목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류성하의 검끝이, 그 목 앞에 멈췄다.

한 치만 더.

한 치만 더 밀면, 이 악인은 끝난다. 강호의 류성하라면 망설임 없이 그 한 치를 밀었을 것이다. 약자를 노린 자의 끝으로.

그러나 류성하의 검은, 그 한 치 앞에서 멈춘 채 떨렸다.

베면, 살인이다.

그가 평생 협이라 불러 온 것 — 악을 응징하고 약자를 지키는 그 검이, 이 땅에서는 모두를 죽이는 독이 되었다. 협을 행하면 표적이 되고, 표적이 되면 여섯이 다 죽는다. 협이 곧 자멸인 땅. 류성하가 평생 믿어 온 검의 도리가, 여기서는 통째로 뒤집혀 있었다.

류성하는 검을 거두었다.

"……꺼져라." 그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알아듣지 못할 말인 줄 알면서도. "다시는 오지 마라. ……다음엔, 나도 장담 못 한다."

우두머리는 그 검을 거둔 손을, 그 떨림을 보았다. 그리고 부하들을 끌고 도망쳤다. 살아서.

류성하는 텅 빈 검을 쥔 채, 오래 서 있었다.

*

"……잘하셨어요."

백서린이 곽철의 맥을 짚으며 조용히 말했다. 류성하의 등에 대고.

"베지 않으신 거." 그녀가 덧붙였다. "강호의 협으로는 베어야 했겠죠. 하지만 여기서 베셨다면, 우린 오늘 밤 다 잡혀갔을 거예요. ……선배는 우릴 살리려고, 협을 접으신 거예요."

류성하는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 옳은 일을 했는지, 비겁한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악인을 살려 보낸 그 손이, 협을 지킨 것인지 버린 것인지. 강호의 율법과 서울의 율법이 그의 검 위에서 정면으로 부딪쳤고, 그 충돌의 한복판에서 그는 처음으로 — 자신의 검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 수 없게 되었다.

"……협이란 게 뭐였을까." 류성하가 낮게,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강호를 벗어나도 그게 협일까. 아니면 그저… 강호에서만 통하던, 우리끼리의 약속이었을까."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그 물음은, 이 여섯 모두가 이 땅에서 끝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것이었다.

— 10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