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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轉移) — 떨어진 자들 · EP3

마녀의 시선

EP3 · 시점 류성하

날이 밝았다.

영기 없는 하늘에도 해는 떴다. 다만 그 빛은 강호의 것보다 묽고 탁했고, 솟아오를수록 도시는 더 낯설어졌다. 밤에는 불빛의 강이던 것이, 낮에는 쇳덩이와 사람의 강이 되어 흘렀다.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었다. 류성하는 평생 이렇게 많은 사람을 한곳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 중 누구도, 그들 여섯을 돕지 않을 것이었다.

고가 아래, 정파 셋과 마교 셋은 여전히 같은 그늘을 나눠 쓰고 있었다. 밤새 누구도 검을 뽑지 않았다. 뽑을 수 없어서였다. 적을 베는 데 쓸 내공이, 하루를 버틸 내공보다 아깝다는 것을 여섯 모두 알았다.

"……배가 고픕니다." 진소운이 말했다.

막내의 그 한마디가, 강호 십수 년의 은원보다 무거웠다. 류성하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화경의 검객이 굶는다는 것은 강호에선 없는 일이었다. 어느 문파, 어느 객잔이든 청천검 류성하에게 밥 한 끼를 내주지 않을 곳이 없었으니까.

여기엔 그를 아는 자가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지." 그늘 저편에서 사도혁이 입을 열었다. 마교 소교주는 밤새 한숨도 자지 않은 얼굴로, 여전히 도시를 읽고 있었다. "굶어 죽으려고 차원을 건너온 건 아닐 테니."

"네 방법이 궁금하군." 류성하가 받았다.

"글쎄. 우선—" 사도혁의 시선이 슬쩍 제 옆으로 흘렀다. "내 사람을 좀 써야겠어."

그 말과 함께, 한 사람이 그늘에서 일어섰다.

여월이었다.

*

류성하는 마교의 여인을 강호에서 몇 번 마주쳤다. 늘 멀리서였다. 혈매(血媚) 여월. 마교가 길러낸 독과 매혹의 명수. 그 이름 앞에 정파의 사내들이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류성하는 소문으로 들어 알았다.

그 여인이 지금,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햇빛 아래에서도 그 걸음은 그늘을 끌고 오는 것 같았다. 흐트러진 머리, 먼지 묻은 옷차림에도 그 자태만은 무너지지 않았다. 붉은 입술이 천천히 호선을 그렸다.

"대협." 여월이 불렀다. 그 목소리는 낮고, 따뜻하고, 귀가 아니라 살갗으로 스며드는 종류였다. "이런 곳에서 뵙다니. 강호에선 그 콧대 높은 청천검이 제게 눈길 한 번 안 주셨는데."

류성하는 직감했다.

온다.

무인은 살기를 읽는다. 그런데 지금 여월에게서 풍기는 것은 살기가 아니라, 그보다 은밀한 무엇이었다. 시선과 음색과, 코끝을 스치는 옅은 향. 그것들이 한데 엮여 그의 정신의 문턱을 더듬고 있었다. 미혼술(媚魂術). 마교가 가장 두려워하는 무공 중 하나.

류성하는 단전에 남은 한 줌 내공을 끌어, 심맥을 가다듬었다.

"……물러서라." 그가 낮게 경고했다. "그 수작, 통하지 않는다."

"수작이라뇨." 여월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향이 짙어졌다. "전 그저, 같이 살아남을 길을 의논하자는 거예요. 이 무서운 곳에서… 대협 같은 분이 곁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하겠어요."

그 목소리가 머릿속을 부드럽게 쓸었다.

보통의 사내라면 여기서 경계를 풀었을 것이다. 그 음색이 그리는 그림은 달콤했고, 영기가 마른 이 땅에서도 여월의 미혼술은 여전히 사람의 마음 틈을 파고드는 법을 알았다.

류성하는 그 달콤함을 분명히 느꼈다.

느꼈으되, 흔들리지 않았다.

*

이상한 일이었다.

여월은 제 술법이 사내의 정신에 닿는 그 순간의 '풀림'을 안다. 눈빛이 흐려지고, 어깨가 내려가고, 경계가 녹는 그 미세한 신호. 평생 그것으로 먹고살았다. 그런데 류성하의 눈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술법이 닿는 만큼, 그 사내는 제 안으로 더 깊이 침잠해 중심을 잡았다. 향도, 음색도, 시선도 — 그의 표면에 닿았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흘러내렸다. 마치 잘 벼린 검신에 물방울이 맺히지 못하고 떨어지는 것처럼.

여월의 호선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류성하는 그 흔들림을 보았다.

"……끝났나." 그가 말했다. 비웃음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저 사실의 확인이었다. "혈매의 미혼술이, 내겐 닿지 않는 모양이군."

여월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었다.

이 땅에 떨어진 뒤로 줄곧, 그녀의 세상은 무너지고 있었다. 내공이 마르고, 미혼술이 묽어지고, 몸 안의 그것이 굶주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미혼술 그 자체가 통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영기가 부족하면 약해질 뿐, 안 통하는 건 아니었다.

이 사내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것은 영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류성하라는 사람의 심지(心志)가, 그녀의 술법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애초에 내주지 않은 것이다. 평생 한 길만 곧게 걸어온 자의 정심(定心). 여월이 가장 다루기 어려워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아니, 다룰 수 없는.

"……재미있는 분이네요." 여월이 가까스로 호선을 되찾으며 속삭였다. 그러나 그 눈 깊은 곳엔, 가면이 처음으로 흔들린 자의 당혹이 어렸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제 눈을 이렇게 똑바로 마주 보는 사람은."

"……." 류성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 순간, 그도 모르게 한 가지를 느꼈다. 미혼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여인의 진짜를 가짜의 안개 없이 마주 본다는 뜻이기도 했다. 농염한 가면 너머, 잠깐 스친 다른 얼굴 — 굶주리고, 경계하고, 지독히 외로운 무엇.

류성하는 그 얼굴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그렇게 생각한 자신을 경계했다. 마교의 독부에게 연민을 품는 것은, 검을 든 채 눈을 감는 것과 같았으니까.

"물러서라, 여월." 그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조금, 아주 조금, 목소리가 누그러져 있었다. 그 자신은 알아채지 못했다. "통하지 않는 수작으로 서로 힘 빼지 말고. ……살아남을 의논이라면, 가면을 벗고 와라."

여월이 그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처음으로 진심에 가까운 무엇이 그 입가에 스쳤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가면을 벗으라니." 그녀가 돌아서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류성하에겐 닿지 않을 만큼 낮게.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늘 저편에서 사도혁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제 수족의 미혼술이 빗나가는 것을, 마교 소교주는 흥미롭다는 듯 — 그러나 어딘가 서늘하게 — 응시하고 있었다.

류성하는 알지 못했다.

오늘 그가 막아 낸 것이 술법 하나가 아니라, 앞으로 그의 평생을 흔들 무언가의 첫 번째 문이었다는 것을. 통하지 않았기에 시작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일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을.

— 4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