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도 류성하는 잠들지 못했다.
낮의 일이 가슴에 얹혀 있었다. 악인을 살려 보낸 손. 멈춘 검. 협이라 믿던 것이 독이 되던 순간. 그는 깨진 창가에 앉아, 잠든 다섯의 숨소리를 들으며 도시의 불빛을 보았다.
"……잠이 안 오시나 봐요."
여월이었다.
그녀 역시 깨어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명치 아래를 가만히 누르고 있었다. 류성하는 이제 그 동작의 뜻을 어렴풋이 알았다. 그녀 안의 무언가가 그녀를 갉아먹고 있다는 것을. 마교의 독부에게도 밤은 길었다.
"……너야말로." 류성하가 답했다.
여월이 소리 없이 다가와, 한 걸음 떨어진 창가에 앉았다. 도시의 불빛이 그녀의 옆얼굴에 묽게 내렸다. 가면을 쓰지 않은 얼굴이었다. 류성하 앞에서 그녀는 늘 맨얼굴이었다 — 미혼술이 통하지 않는 사내 앞에서는, 농염한 가짜를 꾸밀 이유가 없었으니까(fk14).
그것이 문제였다.
*
류성하는 미혼술을 막을 수 있었다.
술법이 그의 정신에 닿으면, 그는 단전에 침잠해 그것을 흘려보냈다. 평생 익힌 정심(定心)이 그의 방벽이었다(c5). 향도, 음색도, 시선도 — 그의 표면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그런데 지금, 그를 흔드는 것은 술법이 아니었다.
여월이 미혼술을 쓰지 않았는데도, 류성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묽은 불빛 속 그 옆얼굴의 지친 곡선이, 명치를 누르는 가는 손가락이, 가면을 벗은 자의 외로움이 — 그의 안으로 스며들었다. 막을 방벽이 없었다. 술법이 아니었으니까.
류성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미혼술은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진짜는, 막을 수 없다.
그 깨달음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강호의 어떤 적보다, 이 영기 없는 땅의 어떤 위협보다 두려운 것이 거기 있었다. 미혼술로 홀린 끌림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술법을 흘려보내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이것은—
흘려보낼 수가 없었다. 이것은 그 자신의 마음이었으니까.
"……대협." 여월이 그의 시선을 느끼고 그를 보았다. 그 눈에 옅은 경계가 스쳤다. "왜 그렇게 보세요."
류성하는 답하지 못했다.
답할 말이, 무인의 곧은 사전엔 없었다. 그는 시선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한 걸음에서 반 걸음으로 좁혀져 있었다. 언제 그렇게 됐는지 알 수 없었다. 류성하는 평생 적과의 간격을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재 온 무인이었다. 그런 그가, 이 간격이 좁혀지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여월의 숨이 가까웠다.
그녀의 눈동자에 도시의 불빛이 흔들렸고, 그 안에 류성하 자신이 비쳤다. 향도 술법도 없이,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 마주한 거리. 무언가가 그 좁은 틈을 팽팽하게 채웠다. 류성하의 심장이, 화경에 오른 뒤 처음 느끼는 박자로 뛰었다.
*
먼저 물러선 것은 여월이었다.
그녀가 흠칫, 명치를 움켜쥐며 몸을 뒤로 뺐다.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류성하는 그 변화를 보았다.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가 — 그녀를 갉아먹는 그것이 — 방금 더 거세게 꿈틀거린 것이다(fk12).
여월은 알았다.
이 사내에게 진심이 향하는 만큼, 미혼고가 그 정을 먹이 삼아 그녀를 더 깊이 잠식한다는 것을. 그녀에게 끌림은 곧 자해였다. 마음을 줄수록, 그녀가 죽었다. 그래서 그녀는 평생 먼저 정을 주지 않았다. 그것만이 도구가 살아남는 법이었으니까.
"……이러지 마세요." 여월이 가까스로 가면을 끌어 올리며 속삭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떨렸고, 그 떨림은 가면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대협 같은 분이… 저 같은 것한테. 정파의 대협이 마교의 독부에게 마음을 두는 건, 양쪽 다 죽는 길이에요. 강호의 율법으로도(c16), 제 안의 이것으로도."
"……안다." 류성하가 낮게 답했다.
그도 물러섰다. 반 걸음의 거리를, 다시 한 걸음으로.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무언가가, 끊어지지 않은 채 늘어났다.
"안다, 여월." 류성하가 제 가슴께를 가만히 짚었다. 거기서 뛰는 낯선 박자를 누르듯이. "이건… 베어야 할 독이다. 정과 마의 끌림은, 강호가 가장 무겁게 금한 것. 게다가 너는 적이고, 나는 너에게 빚을 졌을 뿐이다. 그 빚을, 정으로 착각해선 안 되겠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었다.
여월은 그 말을 들으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안도인지 서글픔인지 모를. 그녀는 다행이라 여기려 했다. 이 사내가 선을 그어 주어서. 그런데 그 다행함의 한구석이, 이상하게 아렸다.
"……그래요." 그녀가 답했다. "착각이에요. 빚일 뿐이죠."
두 사람은 다시 거리를 두고 앉았다. 한 걸음의 간격으로. 그러나 그날 밤 이전과 그 후의 한 걸음은, 같은 한 걸음이 아니었다.
이전의 한 걸음은 적과 적의 거리였다.
그날 밤 이후의 한 걸음은 — 좁히지 않으려 애써야 하는 거리였다.
*
창밖이 희붐해질 때까지, 두 사람은 말없이 같은 도시를 보았다.
류성하는 제 안의 그것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애썼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진짜가 된다는 걸 무인의 직감으로 알았으니까. 끌림이라는 독. 술법으로 홀린 것이 아니기에 더 깊고, 적이기에 더 위험하며, 빚이라는 핑계로도 끝내 가려지지 않는.
그는 그 독을 부정했다.
부정하면서, 한 걸음 너머 여월의 지친 옆얼굴에서 끝내 눈을 떼지 못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 11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