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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이(轉移) — 떨어진 자들 · EP2

영기가 없는 땅

EP2 · 시점 류성하

류성하의 손이 검자루에서 멈췄다.

사도혁의 손아귀가 손목을 죄고 있었다. 적을 제압할 때의 그 힘으로. 십수 년 숙적의 손이 제 손목을 붙든다는 사실보다, 그 손이 떨리지 않는다는 것이 류성하를 멈춰 세웠다. 마교 소교주는 이 상황이 위험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먼저.

낯선 사내가 다시 외쳤다.

류성하는 그 외침에서 단어 몇 개를 건졌다. 움직이지, , 바닥 — 분명 제 귀에 익은 말의 뼈대였다. 그런데 그 사이사이,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낱말들이 못처럼 박혀 뜻 전체를 가렸다. 마치 익숙한 곡조를 낯선 악기로 연주하는 것 같았다.

다만 사내가 겨눈 작고 검은 물건만은, 어떤 말보다 분명했다.

그것에선 살기가 없었다. 칼에도, 활에도 깃드는 그 날 선 기운이 그 쇳덩이엔 없었다. 한데 사내의 눈빛은 칼을 빼 든 자의 것이었다. 무기에 살기가 없는데 사람에겐 있다 — 류성하가 평생 익힌 모든 셈법이 어긋나는 조합이었다.

저것이 무엇이든, 모르는 무기다.

그리고 무인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강한 적이 아니라 모르는 적이었다.

"……물러서자." 류성하가 낮게 말했다.

"드디어 말이 통하는군." 사도혁이 비웃듯 속삭이며, 천천히 손을 들어 보였다. 적의가 없다는, 강호든 어디든 통하는 신호로. 류성하도 검을 도로 밀어 넣고 같은 자세를 취했다.

두 사람이 한 걸음 물러섰다.

사내의 어깨가 미세하게 풀리려는, 바로 그 찰나였다.

어둠 저편에서 짐승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곽철이었다.

마교의 살수는 제 동료가 무기에 겨눠진 광경을 — 그 단순한 그림 하나를 — 참지 못했다. 영기가 말라 광화(狂化)조차 봉인된 몸으로도, 혈랑(血狼)의 본능은 살아 있었다. 그가 낯선 사내의 등 뒤로 짓쳐들었다. 손에는 검은 단도가 번뜩였다.

"안 돼—"

류성하가 외친 것과, 사도혁이 몸을 날린 것이 동시였다.

마교 소교주가 제 부하의 뒷덜미를 낚아채 그대로 바닥에 처박았다. 단도가 회색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곽철이 짐승처럼 으르렁댔으나, 사도혁의 무릎이 그 등을 짓누른 채였다.

"죽이면," 사도혁이 곽철의 귀에 대고 이를 갈았다. "여기선 우리가 끝장이다. 저놈 하나가 아니라."

류성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렴풋이 알았다. 사도혁은 이미 무언가를 계산해 낸 것이다. 이 땅에서 사람을 베는 일이 강호와는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진다는 것을. 저 쇠수레가, 저 빛이, 저 검은 무기가 — 사내 하나의 것이 아니라 거대한 무언가의 끄트머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낯선 사내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무어라 외치며 뒤로 물러섰다. 검은 물건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떨리는 손가락이 그 끝의 작은 쇠를 더듬었다.

"흩어져."

이번엔 사도혁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향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젊고,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었다.

진소운이었다.

막내는 어느새 어둠 속에서 튀어나와, 사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발끝으로 바닥의 회색 모래를 차올렸다. 흙먼지가 사내의 눈앞에 자욱하게 퍼졌다. 표풍신법(飄風身法). 영기가 마른 이 땅에서도, 내공을 거의 먹지 않는 그 가벼운 신법만은 살아 있었다.

"지금!"

류성하는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무인의 몸이란 그런 것이다. 사도혁이 곽철을 끌고, 류성하가 그 뒤를 따라, 네 사람은 빛이 닿지 않는 골목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등 뒤에서 굉음이 터졌다.

천둥도 폭죽도 아닌, 짧고 날카로운 파열음. 무언가가 류성하의 머리 위 벽돌을 때려 파편을 흩뿌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며 달렸다.

저 쇳덩이가… 멀리서 사람을 친다.

류성하는 평생 화살보다 빠른 것을 보지 못했다. 한데 방금,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화살보다 빠르게 날아와 돌을 깨뜨렸다. 등줄기가 다시 서늘해졌다. 이건 영기 부족 따위와는 다른 두려움이었다.

이 세상은, 무공을 모르는 자가 무공을 아는 자를 죽일 수 있는 곳이었다.

*

골목은 미로였다.

좁고, 어둡고, 발 디딜 틈마다 이름 모를 물건들이 굴러다녔다. 류성하는 어느 막다른 벽 뒤에 등을 붙이고 숨을 골랐다. 화경의 폐활량으로도 숨이 찼다. 달리는 데 내공을 너무 썼다. 우물 없는 곳간에서, 또 한 됫박이 줄었다.

옆에 사도혁이, 그 발치에 곽철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마교 소교주는 골목 입구를 응시한 채 미동도 없었다.

"……왜 살렸지." 류성하가 물었다. 곽철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내 칼이니까." 사도혁이 짧게 답했다. "그뿐이다."

거짓말이었다. 적어도 그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류성하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숙적의 속내를 캘 때가 아니라, 살아남는 법을 알아내야 할 때였다.

그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피 묻은 강호의 백의(白衣). 허리의 벽운검. 무인의 곧은 자세. 이 골목에 들어선 순간부터, 류성하는 자신이 얼마나 튀는지를 처음으로 의식했다. 강호에서 이 차림은 명문 검문의 소문주를 뜻했다. 여기서 이 차림은 — 무엇을 뜻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다만 분명한 건, 저 쇠수레의 사내가 자신을 향해 달려든 이유 중 절반은 이 차림이라는 것이었다.

류성하는 벽운검을 풀어, 천천히 백의 자락으로 감쌌다.

평생 손에서 떼어 본 적 없는 검이었다. 그것을 숨긴다는 사실이, 베이는 것보다 아팠다. 검은 무인의 얼굴이고 이름이었다. 그 얼굴을 천 쪼가리로 가려야 사는 땅에, 자신이 떨어진 것이다.

"청천검 류성하가," 사도혁이 그 광경을 보며 나직이 웃었다. "도적처럼 검을 숨기는 날이 오는군."

류성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마교 소교주의 말이 옳았으니까. 그리고 곁눈으로 보니, 사도혁 역시 제 마교 복식의 깃을 여미며 핏자국을 안으로 감추고 있었다.

이 한 가지에서만은, 정과 마가 다르지 않았다.

숨어라. 그러지 않으면 죽는다.

그것이 이 영기 없는 땅이 두 사람에게 가르친 첫 번째 율법이었다.

*

골목 끝에서 인기척이 났다.

류성하의 손이 반사적으로 검을 더듬었다. 그러나 다가온 기척은 익숙한 것이었다 — 곧은 의기(醫氣) 하나, 가벼운 검기 하나.

백서린과 진소운이었다.

"무사하셨군요." 백서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의가(醫家)의 여인은 이 난리통에도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 눈은 이미 류성하의 전신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 어디 다친 데는 없는지, 진맥하듯이. "큰 부상은 없으시고요."

"……너희야말로." 류성하가 두 사람을 보았다. 정파의 동료를 다시 만난 안도가, 잠시 가슴을 데웠다.

그 안도가 길지는 않았다.

골목 저편, 마교의 두 그림자가 사도혁 쪽으로 소리 없이 합류하고 있었다. 농염한 기척 하나와, 차고 끈적한 기척 하나. 여월과… 또 하나. 류성하는 어둠 속 여월의 붉은 입술이 이쪽을 향해 천천히 호선을 그리는 것을, 분명 보았다고 생각했다.

정파 셋, 마교 셋.

같은 골목, 다른 벽. 십수 년을 죽고 죽이던 자들이, 등 뒤로 손을 감춘 채 같은 어둠을 나눠 쓰고 있었다.

"선배님." 진소운이 낮게, 그러나 빠르게 말했다. 막내의 눈은 벌써 골목 너머 큰길의 불빛을 헤아리고 있었다. "저들이 — 저 관(官)처럼 보이는 자들이 — 곧 더 몰려올 겁니다. 저 빛, 저 소리. 한둘이 아니에요. 여긴 우리가 아는 어떤 세상보다… 촘촘합니다."

"촘촘하다니."

"눈이 많습니다." 진소운이 어느 처마 밑, 작고 검은 눈알처럼 매달린 물건을 턱으로 가리켰다. 그것은 미동도 없이 골목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런 게 길마다 박혀 있어요. 사람의 눈이 아니라… 세상이 직접 우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류성하는 그 작은 눈알을 올려다보았다.

등골이 곤두섰다. 무인은 시선을 느낀다. 그런데 저 물건에선 시선의 온도가 없었다. 보고 있되 살아 있지 않은 눈. 그런 눈이, 이 도시의 모든 길목에 박혀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다.

은신(隱身)은 무인의 기본이었다. 한데 사람의 눈을 피하는 법은 알아도, 세상의 눈을 피하는 법은 강호의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일단 저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류성하가 말했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이면서도 낯설었다. 화경의 대협이 입에 담을 말이 아니었다. 적을 베는 말도, 협을 논하는 말도 아닌 — 숨자는 말.

여섯은 흩어져, 그러나 같은 방향으로, 도시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새벽이 오기 전, 류성하는 어느 고가(高架) 아래 어둠에 몸을 누였다.

머리 위로 이따금 쇠수레들이 굉음을 끌고 지나갔다. 그 진동이 등으로 전해질 때마다, 그는 이곳이 꿈이 아님을 거듭 확인했다.

돈이 없었다. 신분이 없었다. 거처가 없었다. 말이 절반밖에 통하지 않았고, 무공은 우물 없는 두레박이었으며, 검은 천에 싸여 짐짝이 되어 있었다. 화경에 오르기까지 바친 삼십이 년이, 이 땅에서는 동전 한 닢의 값어치도 못 했다.

그는 강호에서 수많은 적을 베었다.

한데 이 땅에서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적은, 벨 수 없는 것이었다. 영기 없는 하늘. 사람을 멀리서 치는 쇳덩이. 길마다 박힌 죽은 눈. 그리고 무엇보다 — 모른다는 사실 그 자체.

조금 떨어진 어둠 속, 사도혁의 그림자가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숙적은 패배한 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판을 읽어 내려는 자의, 서늘하게 깨어 있는 얼굴이었다.

저자는 벌써 이 땅을 어떻게 가질지 셈하고 있다.

류성하는 그 사실이, 영기 없는 하늘보다 두려웠다.

그는 천에 싸인 벽운검을 끌어안았다. 검의 차가운 감촉이, 가려져 있어도 거기 있었다. 숨을 골랐다.

살아남는다.

먼저 그것부터다. 협(俠)도, 귀환도, 사도혁과의 매듭도 — 전부 살아남은 다음의 일이었다. 화경의 검객 류성하가, 생애 처음으로, 검을 베는 법이 아니라 숨기는 법부터 배워야 하는 곳.

여기는 영기가 없는 땅이었다.

— 3화에서 계속